땅바닥에 담뱃불을 끄지 마라
러 최대 '에너지 창고' 북극 야말네네츠 자치구
땅바닥에 담뱃불 끄면 불날 정도로 가스 천지…
"유럽, 우리 아니면 추위에 떨 것" 자부심 가득
러, 북극해 대륙붕·해저까지 자원戰 확대 야심
조선일보는 한·러 수교 20주년을 맞아 러시아 서북단 에너지 보고(寶庫)이자 북극해 쟁탈전의 전초기지인 야말네네츠 자치구를 취재했다.
이곳 취재는 한국 언론 사상 처음이다. 북극권을 무대로 한 에너지 개발경쟁, 북극해 영유권 확보전쟁의 현장은 뜨거웠다.
야말네네츠는 러시아의 에너지개발 전략기지로 외국 언론의 개별 취재가 불가능했던 곳이다. 이번 기획은 한러협회(회장 박효식)가 함께 했다.
야말네네츠 자치구(Ямало-Ненецкий автономный округ) 나딤시. 어둠이 짙어지자 오히려 도시의 색채가 뚜렷해진다.
거대한 불기둥이 곳곳에서 하늘로 치솟았다. 북극권 툰드라에 보잘 것 없어 보였던 땅은 순식간에 '불의 공화국'으로 변했다.
그리곤 마치 '문명의 중심'처럼 호령한다. 더 이상 잠자는 빙토(氷土)가 아니다. 유전과 가스전 같은 에너지 개발현장은 천지개벽 그 자체다.
러시아엔 북극해 개발의 전초기지요, 주변국엔 자원 전장의 초입이다.
◆전략폭격기과 핵잠까지 동원
러시아는 최근 수년 동안 북극해를 선점하기 위해 총진군하고 있다.
전략폭격기 TU-95MS를 동원한 감시 활동과 핵잠수함 '세베로드빈스크', 쇄빙선 함대까지 투입했다. 야말네네츠는 툰드라에 떠 있는
거대한 에너지 공급기지다. 지난 22일 나딤시 상공 헬기에서 기자가 눈만 돌리면 유전과 가스전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대형 특수크레인과 시추장비, 대형 파이프 보관창고 등이 끝없이 펼쳐졌다.
이곳에서 유럽까지 이어지는 수십 개 파이프 라인은 아득히 지평선 너머로 꼬리를 감추고 있다.
직경 1200~1400㎜짜리 대형 가스관도 사방으로 어지럽다.
◆대통령 특명과 첨병들
드미트리 코블린 야말네네츠 주지사는 "이곳은 '가조비키(газовики ·가스업종사자들)'와 '네프챠니키(нефтяники ·석유업계종사자들)'가
국토를 개발하고 조국을 수호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제정러시아 시대 황제의 명령을 받아 국경을 확장했던 코사크인들처럼 21세기에는 에너지 개발이라는 대통령 특명을 받고
활약하는 첨병"이라고 말했다. 가조비키는 세계 최대 가스회사 '가즈프롬' 출신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KGB와 내무부 같은 권력부서 출신들이 집권하면서 나왔던 신조어 '실로비키(силовики)'를 빗댄 말이다.
푸틴 총리가 실로비키의 대부(代父)라면, 가즈프롬 출신인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가조비키의 빅 브러더 격이다.
◆땅바닥에 담뱃불을 끄지 마라
러시아는 가스 매장량(44.38조㎥) 세계 1위, 석유 매장량 742억 배럴로 세계 7위(2010년 6월 BP통계)인 자원 대국이고,
야말네네츠는 그중 가장 큰 에너지 창고다. 이곳은 러시아 가스 생산량의 90% 이상, 전체 석유 매장량의 74% 이상을 감당하고 있다.
이곳에서 나오는 석유의 80% 이상이 유럽으로 수출되고 있고, 유럽에서 쓰는 천연가스의 25%는 야말네네츠 산(産)이다.
러시아가 2005년과 2006년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것도 야말네네츠의 가스공급 밸브를 잠갔기 때문이다.
12월이면 영하 30~60도를 오르내리는 살인적인 추위가 엄습하지만 이곳 에너지 업계 종사원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모피 옷을 둘러쓴 가즈프롬 직원 나탈리야 랴브첸코(32·여)는 "유럽은 우리가 아니면 추위에 떨 것"이라며
"이곳엔 담뱃불을 땅에 비벼 끄지 말라는 농담을 한다"고 말했다. 땅에 비비는 순간 가스가 금세 새나와 화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 ▲ 그래픽=김현지 기자 gee@chosun.com
◆특정국가에 편중된 에너지
작년 5월 세계적인 지질학자 도널드 고티에 박사가 이끄는 미국지질조사국(USGS) 연구팀이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북극권 자원에 대한 종합 평가를 발표하면서 이곳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더욱 고조됐다.
퇴적암의 침전물을 분석한 USGS는 "북극권에 석유 1600억 배럴, 천연가스 44조㎥가 매장돼 있다"고 밝혔다.
석유는 세계 수요량의 5년, 천연가스는 10년 분량을 소화할 수 있는 양이다.
러시아·미국·캐나다·노르웨이·덴마크 같은 관련국들이 북극권 자원탐사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이 에너지는 상당량이 러시아 내륙에서 북극으로 이어지는 바다에 매장돼 있다. 고티에 박사는 "북극권 에너지가 특정국에
편중돼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러시아의 천연가스 장악력과 전략적 통제 가능성이 강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북극을 향해 떠나는 에너지 노마드(유목민)
러시아의 자원개발 전선(戰線)은 야말네네츠에 멈추지 않고 북극해 대륙붕과 해저로까지 뻗어가고 있다.
2007년 북극해 심해에 러시아 국기를 꽂으면서 에너지 개발의 야심을 감추지 않았고, 에너지 확보를 위한 영유권 전쟁에도 뛰어들었다.
드미트리 치호프(42) 야말네네츠 행정실 정치과학 담당관은 "지구온난화와 첨단기술 개발로 에너지 개발 권역이 점차 북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스전과 유전개발이 야말네네츠에 처음 시작된 게 1972년이다. 이곳의 '가조비키'와 '네프챠니키'는
지금 북극해로 떠나는 '에너지 노마드'를 자처하고 있다.
☞야말네네츠 자치구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약 2500㎞ 떨어진 북극권 서(西)시베리아에 위치해 있다.
서북단 땅끝마을로 인간이 살 수 있는 최후의 지역이다. ‘야말’은 네네츠 원주민어로 ‘세상의 끝’을 의미한다.
러시아 석유 매장량의 74%, 천연가스 매장량의 75%를 차지한다.
러시아 정부가 에너지안보 전략지로 선정한 이곳은 북극해 쟁탈전을 위한 전초기지로 탈바꿈 중이다.
조선일보·한러협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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