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sia/사진으로 본 러시아

뿌쉬낀 (1799-1837)

yc.cho 2010. 9. 20. 18:25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뿌쉬낀(1799-1837)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20세기의 마지막 해였던 1999년은 러시아인들에게 있어 근세에 들어 가장 의미가 깊은 해 중의 한 해였다.

러시아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문학가 뿌쉬낀이 탄생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1799년 6월 6일(구력 5월 26일) 러시아 국민문학의 창시자인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뿌쉬낀은

모스크바의 네메쯔까야 슬라바다 거리(Ул. Немецкая слобод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세르게이 리보비치(Сергей Львович)는 600년의 오랜 전통을 지닌 귀족 집안의 출신으로

당시 뻬쩨르부르그 사교계의 절세미인이었던 간니발 집안의 나줴즈다 아시뽀브나(Надежда Осиповна)와 결혼했다.



간니발은 이디오피아 귀족 출신으로 전쟁포로로 잡혀 뾰뜨르 1세에게 상납되었으나

뾰뜨르 대제는 그를 대자로 삼아 귀족의 칭호를 수여하고 러시아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고관의 딸과 결혼시켰다.

뿌쉬낀은 그의 첫 역사소설 "뾰뜨르 대제의 흑인"(1827. Арап Петра Великого)에서 외증조부인 간니발을 모델로 삼았다.


사교가였던 부모와는 달리 어린 사샤(뿌쉬낀의 애칭)는 무뚝뚝한데다가 지나치게 부끄러움을 많이 탔던 탓에 항상 부모의 관심 밖에 있었다.

이런 그를 감싸안은 사람은 다름아닌 할머니 마리야 알렉세예브나(Мария Алексеевна)였다.

이 할머니가 뿌쉬낀의 최초의 러시아어 교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당시 귀족가들과 마찬가지로 뿌쉬낀가에서도 불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사샤는 할머니를 통해 러시아어로 조상들 이야기를 들었다.



유년시절의 사샤에게 있어 할머니 이상으로 중요한 사람이 바로 유모인 아리나 라지오노브나 야꼬블례바(Арина Родионовна Яковлева)였다.

해방농노였던 그녀는 러시아 구전 전래동화, 속담, 민요 등을 많이 알고 있었고,

그녀 덕분에 어린 뿌쉬낀은 마음 속에 러시아의 전래문학과 일반 서민들이 사용하는 러시아 구어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키워 나갔다.

뿌쉬낀은 유모에게 애정이 넘치는 수많은 시들("겨울 밤"(1825. Зимний вечер), "유모에게"(1826. Няне) 등)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예브게니 오녜긴"(Евгений Онегин)에서는 자신의 유모를 모델로 하여 따찌야나 라리나(Татьяна Ларина)의 유모상을 창출해 내었다.



어린 뿌쉬낀에게 또 다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이 숙부인 바실리 리보비치(Василий Львович)였다.

그는 당시 제법 재능있는 시인이였는데, 모스끄바의 문학가들을 뿌쉬낀가로 끌여들었다.

그리하여 드미뜨리예프(Дмитриев), 까람진(Карамзин), 쥬꼽스끼(Жуковский), 바쮸쉬꼬프(Батюшков) 등

당대의 유명한 문학가들이 그의 집에 드나들았고 사샤는 활발한 토론, 시 낭독, 문학계의 여러 동향들을 듣게 되었는데,

그러는 사이 소년은 남달리 조숙해졌다.

또한, 아버지의 훌륭한 서재는 미래의 위대한 문학가의 탄생에 밑거름이 되었다.

18세기 프랑스 철학서적부터 그리이스, 로마의 고전, 서유럽과 러시아의 문학 작품 등 많은 책이 있었는데,

사샤는 닥치는 대로 그 책들을 탐독해 나갔다.



이렇게 열두 살까지 아버지의 집에서 자라던 사샤는 1811년 숙부의 손에 이끌려 알렉산드르 1세에 의해 세위진

짜르스꼬예 셀로(Царское Село)에 위치한 리쩨이(Лицей)에 제 1기생으로 입학한다.

여기에서 뿌쉬낀은 평생 친구인 이반 뿌쉰(Иван Пущин), 델비끄 남작(Дельвиг), 뀨헬베께르(Кюхельбекер)를 만나게 되고

이들과의 우정은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리쩨이 개교 기념일인 10월 19일을 기념하여 뿌쉬낀은 여러 편의 시를 썼는데,

특히 추방당했던 미하일롭스끄(Михайловск)에서 쓴 시 "10월 19일"(19 октября)에서는 친구들을 회상하며 그들의 우정을 기리었다.


뿌쉬낀이 시인으로서 인정받은 것도 바로 리쩨이 재학시절이었다.

1815년 리쩨이 시험에 러시아 문단의 원로인 줴르좌빈(Державин)이 출석해 있었는데,

뿌쉬낀은 자작시 "짜르스꼬예 셀로의 회상"(Воспоминание в Царском Селе)을 낭독하였다.

노시인은 소년시인을 극찬하였고, 그의 재능을 인정해 주었다.



1817년 리쩨이를 졸업한 뿌쉬낀은 뻬쩨르부르그에서 외무성의 관리생활을 시작했다.

1820년 3월 그의 첫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Руслан и Людмила)가 완성되었다.

러시아 전래 구전 설화에 바탕을 둔 이 서사시는 러시아 대시인의 출현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그러나, 이 서사시가 출판되기도 전에 뿌쉬낀은 일련의 반독재 성향의 정치시("자유"(Вольность), "농촌"(Деревня))로 인하여

남러시아로 유배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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